의군의 정훈을 담당하여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광무황제에게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전국 유림과 함께 예.의.도에 위배된 3대사를 상소하고 을사조약과 경술합방이 왜적의 협박으로 체결되었음을 재소(再疏)하였다.
불란서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일제 침략을 지탄하고 자주독립을 탄원하는 장서를 전국 유림 317인 연서로 발송하니 그를 기념하는 한국유림 독립운동파리장서비(獨立運動巴里長書碑)가 장충단 공원에 역사의 한 장으로 건립되었다.
한편 남촌 곽경열(南村 郭京烈)을 통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밝혀지자 구국의 첩경인 인재양성에 전력하다 운명하니 정부에서 건국포장(建國襃章)을 추서(追敍)하고 사론(士論)의 뜻대로 면암(勉庵).수남(秀南)과 함께 도동사에 봉안되었다.
가평마을 내에 위치한다. 외삼문 안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방호정사가 위치하며, 그 뒤에 다시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도동사가 배치되어 있다.
이 곳은 원래 고석진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방호정사(1923년)가 있던 곳인데, 1928년 후학들이 방호정사의 안쪽에 사우(祠宇)를 지어 도동사라 이름하고 최익현을 주벽으로 고석진을 함께 모셨다.